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학 12도 (문단 편집) == 특징 == 고려시대의 [[과거 제도]]는 [[국학]]([[국자감]], [[성균관]], 학당[* 고려 말, 지방의 향교에 대응하는 중앙 교육기관.], [[향교]])의 학생이 아니더라도 응시 기회를 제공했다. 당시 과거 제도의 관례로 좌주(座主, 스승이자 시험관)와 문생(文生, 학생이자 과거 응시자)의 관계가 밀접했던 점은 사학의 유지에도 기여했을 것이다. [[문벌귀족]]들은 사학을 적극 이용해 스승인 시험관이 뽑아주는 것으로 중앙 관직에 나아갔으며 그들 자신이 또 시험관이 돼 다른 문벌귀족들을 중앙으로 진출시켰다. 합격자들은 부모가 살아있더라도 반드시 좌주를 먼저 찾아뵙는 것이 예법이었으며 사학은 [[청탁]]이 오가거나[* 청탁의 일례로, 좌주 [[김부식]]이 권력을 잡은 뒤 문생 대부분이 높은 관직에 오른다. 그러나 집안이 가난했던 문생 [[오인정]]이 한미한 관직에서 머무르니, 김부식은 [[탐라]]의 지방관직을 주고 문생을 제주도로 보낸다.] 당파를 이루게 되는 기반이 되기도 했다. 고려 중기 국학의 필요에 의문을 가지며 국고의 낭비만 가져오는 국자감을 폐지하자는 재상 [[소태보]]의 상소로 국학과 사학의 관계를 살필 수 있다. [[숙종(고려)|숙종]]같이 왕권 강화에 힘쓴 왕들은 국학을 적극 밀어줬으며 이후 [[무신정권]]의 득세로 주춤했지만 고려 후기에도 사학과 연관된 관례는 마찬가지로 유지됐다. [[공민왕]] 시기 진사 [[이색(고려)|이색]]은 국학의 생도가 아니면 과거 응시 기회를 주지 말자는 상소를 올리기도 한다.[* 『고려사』 권74, 선거 2, 학교.] 이색은 성인을 만들기 위한 유학이 벼슬하기 위한 학문으로 변질된 것을 안타까워하며 12도를 나온 학생들 모두 다시 성균관을 통해 관직에 나갈 수 있도록 교육 제도를 바꿀 것을 건의했다.[* 『고려사』 권115, 이색 열전.] [[성리학]] 이념과 맞지 않다고 여겨진 사학은 [[신진 사대부]]들이 권력을 잡은 뒤 전면 폐지된다.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[[서원]]이 하나둘씩 세워지기 전까지 한국 교육사에서는 사학이 주춤하는 모습을 보인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